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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누가복음 7:1-17

요절:누가복음 7:14

2010

 

젊은이야 일어나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2010년도 UBF 홍보 포스터가 나왔습니다. 타이틀이 ‘내 스펙은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왜 성경이 나의 스펙인가 하는 설명이 몇 개 나왔습니다. ‘나를 업그레이드 해준다. 자존감을 높혀 준다. 참된 사랑을 찾아 준다. 소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은 그 이상입니다. 왜 그런가를 오늘 말씀은 보여줍니다. 말씀이 내게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말씀만 하셔서(1-10)

어떤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백인대장입니다. 그는 가버나움 지역사령관으로 갈릴리 전체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 권력이나 권세가 막강합니다. 그런데 그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인재경영’을 내세우던 기업도 일생동안 충성한 직원이 나이가 들면 명퇴를 시킵니다. 그런데 종이 병들었습니다. 종은 당시 재산목록에 불과했습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종을 말하는 가구라고 했습니다. 희조목자처럼 박사학위라도 딴 종은 그래도 명품가구입니다. 반면에 저같이 흰머리가 조금씩 나면 중고가구입니다. 병들어 죽게 된 종은 부서진 가구로 내다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에 보면,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종이었지만 그 종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그 종을 무척 귀하게 여겨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백부장에게는 예수님이라면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장로들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백부장의 부탁을 받은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간곡히 탄원을 했습니다.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장로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을 가리켜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성경에는 ‘부탁을 들어줘도 될 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도와주실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은 식민지 유대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백부장은 점령지의 로마사령관입니다. 서로 원수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인간미와 섬김에 유대의 장로들까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백부장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구하였습니다.

장로들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 장로들은 백부장에 대해서 예수님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봐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백부장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서 예수님을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 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처음에 백부장은 사랑하는 종을 어찌하던지 낫게 하고자는 다급한 마음에 예수님의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오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이 단지 능력만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나 그동안 행한 것도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눅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았습니다. 얼마나 신이 나고 신났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우리는 자주 자신이야말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다 있습니다. 나름대로 인간성도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수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자신이야말로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서 불평하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라도,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또 뭔가 사람들이 인정할만큼 많은 수고를 했을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이것을 깨닫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은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고백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을 생각할 때 주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도 괴롭습니다. 또 자기가 감히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죽어가는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에는 모니터로 환자를 보고 심지어 로봇트로 수술까지 하는 원격진료시스템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어가는 종을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그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집에 누워있는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최첨단 의료시스템인 원격진료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그 상태를 확인조차 되지 않은 환자라도 낫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군 생활 속에서 명령체계를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상관이 명령하면 직접 가지 않아도 그대로 됩니다. 왜냐하면 상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상관의 신분이 곧 말의 능력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명령 하나면 종을 병들게 한 병마의 세력도 순종해서 나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고 놀라며 말씀하셨습니다. 9b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고 눈으로 능력을 봤습니다. 당연히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니라, 이방인인 백부장이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런 믿음’은 ‘이만한 믿음’입니다. such great faith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믿음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인정하시고 감동하셨습니다. 그 믿음대로 예수님은 죽어가던 백부장의 종을 말씀의 능력으로 살리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병마의 세력도 제압하는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죽어가던 종도 살아납니다. 죽어가던 인생도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역사합니다.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라도 단순하게 그 말씀의 능력을 믿으면,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일으키고, 상한 자를 치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일어나라(11-17)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나인은 9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운, 귀여운’이라는 뜻입니다. 나인성은 봄마다, 꽃 잔치를 하는 연세, 이화동산처럼 아름다운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 가까이 가셨을 때 성에서 나오는 한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신이 누운 관을 따라가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누가 죽은 것입니까? 과부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일찍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과부로 산다는 것은 힘들고 괴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래도 과부는 남편이 남기고 간 외아들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외아들은 과부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커가는 외아들을 바라보며 내일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외아들이 자라 대학 새내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 키웠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외아들이 덜컥 죽고 말았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남편도 잃고, 이제 하나뿐인 자식마저 잃은 여자의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이제 모든 인생의 보람도 기쁨도 소망도 아들의 죽음과 함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아들이 죽었는데 살아있는 자신이 오히려 원망스럽고 한스러웠습니다. 여자는 도저히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여자는 고통 속에 절규하며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아무리 슬퍼한다 할지라도 죽은 아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자를 따라가며 같이 슬퍼했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가엽게 여긴다는 것은 ‘창자가 뒤틀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겪는 슬픔에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내가 겪는 슬픔과 고통을 나와 함께 나누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슬픔을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울지 말아라’하셨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외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과부에게는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체념의 말씀이나, 이제 그만 울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아들을 살려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요, 진정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여인을 위로하여 주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가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게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은 앞으로 나가셔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관을 만지는 것은 율법에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위로하고자 율법을 뛰어 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어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과부의 외아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지금 죽어서 관속에 누워있는 과부의 외아들은 시체였습니다. 살았을 때는 그래도 힘이 넘치는 젊은이요, 어머니의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한 자요, 쓸모없는 자였습니다. 일생 자신하나 바라보고 산 어머니에게 슬픔과 절망밖에 줄 수 없는 한심스런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요, 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치 늦게까지 자고 있는 젊은이를 깨우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은 죽어서 관속에 누워있는 시체를 향해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주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서 활기찼던 그 젊은이의 모습으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죽은 자리에 누워 있지 말고, 이제 다시 꿈과 희망을 가진 젊은이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은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자던 사람이 일어나 깨어나듯이 관에서 과부의 아들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젊은이를 과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죽음은 과부에게서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슬픔과 절망만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과부의 아들을 되찾아 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과부는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다시 기쁨을 찾았습니다. 미어지던 슬픔이 벅차오르는 환희와 감동으로 바뀌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 예수님은 죽음도 정복하는 부활의 주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습니까? 또 어떻게 백부장의 죽어가는 종을 낫게 하셨습니까?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인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단편을 썼습니다. 그는 이 단편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인생의 진리를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외아들을 얼마나 끔찍이 사랑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랑만으로 죽어가는 외아들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 사랑은 무력했습니다. 사실 죽음을 이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병들어 죽어가던 종이 듣지 못했습니다. 또 죽어서 관에 누워있던 과부의 아들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으로 그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병마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굴복시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그 능력을 발휘하려면 우리가 말씀을 잘 이해하고 듣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얼마나 깊이 이해했느냐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또 나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과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느냐는 것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신앙수준이나, 나의 신앙경력에 상관없이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위대합니다.

우리가 매주 말씀을 듣지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병든 나를 살리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마냥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건성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단지 나의 스펙 쌓기로 여기고 성경을 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연구하기를 성경에는 7481개의 약속이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내가 믿는다면 주님의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병들어 죽어가던 나의 인생을 살립니다. 심지어 살았으나, 청년이지만 죽은 자와 같이 살던 나를 일으켜 살게 합니다. 나의 인생을 전혀 새롭게 합니다. 위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함으로 우리의 병든 부분이 치료되고, 죽었던 부분이 살아나 젊은이다운 삶을 살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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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백부장은 거의 죽게 된 종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1-3)? 유대장로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4,5)?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2.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6a)? 백부장이 친구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하는 아뢰는 것이 무엇이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6b)?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백부장이 왜 ‘자격’이 없다고 했을까요?

 

3. 백부장이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7)? ‘말씀만 하셔서’에 나타난 그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또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8)?

 

4.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칭찬하셨습니까(9)? ‘이런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10)?

 

5. 예수님께서 나인성 가까이 이르러 어떤 행렬을 만났습니까(11,12)?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13)?

 

6.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14)? 그러자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15)? 이 일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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