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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누가복음 6:37-49

요절:누가복음 6:47

2010

듣고 행하는 자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저는 지난주에 ‘복과 화’까지만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당연히 나누어야 할 ‘원수사랑’에 대한 것을 빼먹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자님의 마음에 원수를 사랑하기 힘든 마음이 있는가 보지요?’ 그 분은 제 마음을 꼭 짚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막상 원수가 생기면 사랑은 고사하고 분노에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또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또 왜 그래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37절을 보겠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재판관이 되어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 저런 사람은 쫓아내야 돼’ 하는 결정을 내가 내리는 것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풀이하고 복수하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앙적인 정신과 의사인 스캇팩 박사는 말하기를 ‘분노에 집착할수록 더 오랫동안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하였습니다.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욥기5:2에 보면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보면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도 나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남을 정죄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도 나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남을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용서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류는 다를지 모르지만 다 뭔가 묻어 있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다 용서가 필요합니다.

1974년 5월 20일에 프랑스 카톨릭 교회의 한 추기경이 심장마비로 급사했습니다. 뛰어난 학자이며 추기경인 그는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지가 추기경이 사실은 한 카바레 댄서의 아파트에서 죽었다고 폭로했습니다. 또 추기경이 막대한 현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온 세계가 들끓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한 신문사설이 실렸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인간이 모두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모든 비난이 조용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똑같은 문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도 누군가의 용서를 받아야 할 때가 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내 사전에 용서란 없다고 하면 그가 받을 사람의 용서도, 하나님의 용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며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주실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용서를 주고, 사랑을 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풍성하게 보상해 주십니까? 제가 어려서 쌀을 사러 가면 주인이 되로 퍼 주었습니다. 주인이 야박하면 쌀을 푼 다음에 손으로 싹 깎습니다. 그런데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면서 깎기 때문에 가운데가 쏙 들어갑니다. 주인의 마음이 너무나도 너그러우면 푸짐하게 담아 흔들어 넘치도록 후에게 되어 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한 것이 없어서 받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또 우리가 야박하게 하면 우리도 야박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은 내가 준 것보다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흔들어 넘치도록 주십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용서가 넘치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이 넘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바라며 용서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눈 먼 사람은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눈먼 사람이요, 하나님의 축복에 눈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도 눈 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도합니다. 뭔가 상담을 하고, 뭔가 가르치고,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심판과 정죄의 구덩이에 빠지고 분노와 복수심의 구덩이에 빠집니다. 그런데 둘 다 소경이라 결국 그 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용서를 알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의 인생을 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이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단 김연아 선수의 코치는 두 번의 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번 올림픽에서 스승도 이루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김연아 선수는 끊임없이 훈련을 했고, 코치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움이 단지 스포츠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또 눈먼 인도자다 되지 않으려면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배워야 할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기술처럼 배워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캇펙 박사는 ‘값싼 용서’라는 글에서 말하기를 ‘아무리 지혜를 발휘해도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란 정말로 힘든 과정이다.’ 하였습니다. 진정한 용서란 정말 힘들기 때문에 피겨스케이터가 트리플 점프를 배우듯이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용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단지 어떤 테크닉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용서가 무엇인지를 아는 가운데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의 기술이 탁월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입니다. 그의 형들은 그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은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인생역전이 일어나 그가 총리로 성공했을 때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형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바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탁월한 용서의 기술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1,42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고자 하는 것은 형제의 잘못을 고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를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형제의 눈 속에 티가 있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자기 눈만 멀쩡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보다는 훌륭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빼 내주고자 하면서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들보는 대들보를 말합니다. 쉬운 성경은 큰 통나무라고 번역했습니다. 티는 그야말로 작은 부스러기입니다. 그에 비해 들보는 큰 통나무입니다. 눈에 티가 들어가면 눈물이 나고 조금 아플 뿐입니다. 그러나 통나무는 그 눈에 들어갈 수도 없지만, 아예 눈을 가로막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티에 비할 때 자기 자신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달려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티를 빼내 주고자 하다가 형제의 눈을 뺄 수 있습니다. 아예 그 형제를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약점, 다른 사람의 잘못,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어떻게 해결해주고자 하기만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의 도우려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주려면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합니다. 내 눈을 가리는, 내 앞을 가로막아서 잘 볼 수 없게 하는 들보인 큰 통나무부터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 밝히 볼 수 있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도 빼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 눈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먼저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밝히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이제 봄입니다. 저는 이번 봄에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사다가 심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겉모습만 봐서는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아는 방법은 가을에 맺는 열매를 보고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신자인지? 정말 사도인지 아니면 폼만 잡고 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맺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무화과나 포도와 같은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먼저 그 나무가 그 열매를 맺을 가능성을 가져야 하고, 뿐만 아니라 그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단은 가시나무요, 가시덤불과 같았던 자가 무화과나 포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만 갖고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에 놓은 악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갈무리해 놓는 다는 것은 쌓아놓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평소에 조금씩 그가 생각하고 행한 대로 마음에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악을 쌓은 사람은 결국 악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선을 쌓으면, 결국 선이 나옵니다. 여기에서의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빼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눈에 큰 통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잠언에 보면 “성격이 불같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하여 준다고 하여도 그때뿐 구하여 줄 일이 또 생길 것이다.”(잠언 19:19) 하였습니다.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힘든 가운데서 성질대로 하지 않고 선을 쌓는 사람은 선을 냅니다. 그러나 불같은 성격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살면 결국 그 악으로 인해서 자신이 화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가꾸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46절에 보면, 예수님께 ‘주님 주님’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 주님’하면서 찾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게 주님을 찾는 모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 내게 아쉬운 것을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필요한 것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과 같은 지를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48절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위에다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집을 짓는데 적당히 파서 철근 몇 개 깔고 기둥세우고 지으면 쉽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기초공사를 하면서 지으려면 돈도 많이 듭니다. 또 그 노력한 것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기초공사를 하면 홍수가 나서 물살이 들이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진이 나도 폭삭 주저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지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를 튼튼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은 기초 없이 맨 흙 위에다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실제로 우간다에 가면 이렇게 집을 짓습니다. 흙에다 기초없이 그대로 시멘트 좀 살짝 붓고 그대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습니다. 이런 집은 지진이 살짝 나면 다 무너집니다. 홍수가 나서 기초가 물살에 쓸려나가면 다 무너집니다. 이번에 칠레에 지진이 났습니다. 칠레에 난 자신이 아이티에 난 것보다 800배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800배의 피해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가 적었습니다. 그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건물을 지을 때 지진에 대비해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진에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이티 건물은 전혀 지진에 대비하지 않고 지었다가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날 때가 옵니다. 인생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당히 살면 그 인생이 무너지고, 신앙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서 기초를 든든히 하면 시련의 날에도 견고합니다. 그 신앙과 인생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특히 순종해야 할 말씀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원수들 때문에 아픔이 있고 손해를 볼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선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인생이 견고해집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특히 용서와 사랑을 통해 마음에 선을 쌓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신앙의 기초, 인생의 기초를 견고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듣고 행하는 자

 

1. 남을 심판하는 대신에 무엇을 해야 하며,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37)? ‘남에게 주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되받게 됩니까(38)?

 

2. 눈먼 사람이 왜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없습니까(39)? 제자가 어떻게 하면 스승과 같게 됩니까(40)? ‘위선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41-42)? 원수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3. 나무는 무엇으로 평가받습니까(43-44)? ‘선한 사람’ ‘악한 사람’는 각각 무엇을 냅니까(4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어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까(46-47)?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듣고 행하는 자’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각각 어떤 사람과 같습니까(48-49)?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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