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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누가복음 6:1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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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누가복음 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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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복과 화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오늘말씀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마태복음의 말씀과 달리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비교해서 ‘평지수훈’ 또는 ‘평지교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들의 수준 높은 삶의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세상과 분리된 산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전했습니다. 평지는 세상과 분리된 산위가 아니라, 세상에 들어와 있는 모습입니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시기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단지 신자의 높은 윤리적인 삶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어떤 삶을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20-23절입니다. 다른 하나는 24-26절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의 마지막 절에 보면 공통된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곧 선지자입니다. 구약에서 이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자나 선지자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복 있는 예언자, 복 있는 사도이겠습니까? 누가 화를 당하는 거짓 예언자, 거짓 사도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요, 또 사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복 있는 예언자, 복 있는 사도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복 있는 예언자, 복 있는 사도(20-23)
먼저 2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 복 있는 예언자, 복 있는 사도의 첫 번째 조건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하면 뭐가 제대로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가난은 돈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제대로 된 명품하나 갖고 있지 못한 그러한 가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가난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로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가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흔히 마음이 가난하다고 하면, 마음이 연약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지도 없고, 어떤 확신도 없고 용기도 없고, 우유부단하고 약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가난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에게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겸손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자신에 대해서 부유한 사람은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절박함도 없습니다.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랑할 것이 많기 때문에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겸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지난주에 박사졸업을 한 희조 목자는 가난한 어촌에서 막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가난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가난과 운명을 물리학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물리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택에 그가 물리학 석사를 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한없이 부유해졌습니다. 물리학을 통해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실험의 실패가 그를 절망에 빠트렸습니다. 가끔 마시는 소주도 그의 절망을 극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은성목자의 초청으로 성경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나,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기쁨과 소망을 붙잡고 여러 힘든 조건들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박사과정을 하면서 가정을 이뤘고, 두 아이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자로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박사가운을 입었습니다.
2주전에 저는 2010학번들을 전도하고자 설문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민되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나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30년 후배인 그들을 돕겠다고 추위에 떨고 있는 제가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보던 새내기들의 모습입니다. 저도 입학할 때 그러하였고, 우리들 모두들 대부분 그러하였습니다. 뭔가 자신감에 차 있었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복된 자는 자신감에 넘치는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에 보니 시제가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다른 복 있는 사람들이 받는 복은 다 미래형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가난한 마음으로 복음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요, 사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중의 하나는 나는 예전에 은혜를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유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사도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복 있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하므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므로 사도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굶주린 사람, 슬피 우는 사람은 결코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굶주린다는 것은 배고픔을 말합니다. 배가 고파서 어찌하던지 배를 채우고자하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픈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굶주림을 마태복음에 보면 의에 대한 굶주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굶주림은 사도로서의 굶주림입니다. 사도로서의 굶주림은 어찌하던지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자의 굶주림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루고자하고, 채우고자하는 자의 간절함을 갖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 바로 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사창가 유적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얼마나 힘든 곳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심지어 아시아에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배 부를 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더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 복음 선포에 대해서 배고픈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배고픔으로 로마에 갔고, 셋집에서 복음을 전하며 로마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세기 후에 로마는 복음으로 정복되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배부르게 합니다. 주의 은혜는 우리를 풍족하게 하고, 여유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은혜에만 누리면서 배가 불러 있으면 복 있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에 배부를지라도, 복음을 전하는 것에 굶주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찌하던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배부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복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또 주님은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슬피 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슬피 우는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슬피 우는 것입니다. 사도의 삶을 살다가 목자의 마음 때문에 슬피 우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인 상해서 슬피 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거부하는 예루살렘 사람들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눌려서 사는 사람들을 보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예전에 현경사모님은 말씀을 전하지만 거부하는 후배들 때문에 슬피 울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꽉 찬 은성형제를 돕고자 하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는 그를 보며 슬피 울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슬피 우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웃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여기에 보면,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굶주림을 갖고 있다면, 지금 내 마음에 복음을 전하는 아픔 때문에 슬피 우는 것이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배부르게 될 것이고, 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삶을 살 때 굶주림이나 슬피 우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아픔을 겪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이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에게는 복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미워합니다. 심지어 배척하고 욕하고 이름이 악하다고 내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을 우리도 겪습니다. 캠퍼스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한참 후배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말을 걸면 쳐 다도 안봅니다. 정말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너무나 마음이 상해서 자기를 무시한 그 후배를 쫓아가서 ‘내가 몇 년 선배인데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배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존심은 조금 회복될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겪는 일은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상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도의 지미리 선교사님은 경찰의 감시 때문에 지금도 주일예배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탄예배를 보는데, 폭탄을 던져서 테러를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을 전하며 사도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과 고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날에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1등을 하고 금메달을 딴사람들은 기뻐하며 뛰놉니다. 그런데 신자는, 사도는 경쟁에서 이겨 1등을 해야 기뻐하고 뛰노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척하고 욕하고 악하다고 내칠 때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12: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도의 삶은 곧 구약시대의 예언자와 같습니다. 그 삶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큰 상으로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의 큰 상을 받는 복 있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둘째, 화있는 예언자, 화있는 사도(24-26)
24절부터 26절의 내용은 앞에 나온 복 있는 예언자와 정반대의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가난하지 않고 부요합니다. 굶주리지 않고 배부릅니다. 슬피 우는 대신에 지금 웃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욕을 먹기보다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합니다.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왜 이들이 화를 당합니까? 부요한 사람은 아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고, 절박함이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습니다. 이미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얻지 못하므로 화가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도 아쉬움이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열망을 갖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는 굶주리게 될 것이므로 화가 있습니다.
또 지금 누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웃는 사람, 자신만의 행복에 취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안타까움이 없는 사람들은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과 구별됨이 없이 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좋은 말만 듣는 사람도 화가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구약의 거짓 예언자와 같습니다. 즉 이들은 겉으로는 신자요, 제자요, 사도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거짓 신자요, 거짓 제자요, 거짓 사도의 모습입니다.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셋째, 무엇이 복이고 화인가? 예수님은 이상에서 복 있는 자와 화있는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흔히 복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넘어져서 2등이 되었습니다. 신문은 또 다시 불행에 울었다고 썼습니다. 흔히 말하는 복과 화는 이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승리,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과 화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과 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질적인 축복이나, 성공하고 1등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부르신 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는 자로 복을 주셨습니다. 열매를 맺는 자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 복을 사람은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이 복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므로 포로 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불러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본래 하나님이 주셨던 그 복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도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나를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사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화가 있는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자기만족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구원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복과 화가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은 구약의 예언자나 선지자와 같은 사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굶주림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때론 슬피 울고 아픔과 미움을 당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큰 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 사도로 살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하므로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널리 확산되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어디로 내려오셨습니까(17a)? 그때 어떤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로 왔습니까(17b)? 예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18,19)?
2. 예수님은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20)? ‘가난한 사람’은 어떤 자이며, 이들이 누리는 복은 무엇입니까?
3.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장차 어떤 복을 얻습니까(21)? 왜 인자 때문에 배척과 욕을 먹고 이름을 악하다고 할 때 왜 기뻐하고 뛰놀 수 있습니까(22-23)?
4. 어떤 자에게 화가 있습니까(24)? ‘부요한 자’는 왜 화를 당합니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좋게 말할 때’에 왜 화가 있습니까(25-26)?
5.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27-28)? ‘원수’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갖기 쉽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29-30)?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31)?
6. 죄인들도 서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32-34)?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5a)? 그리하면 어떤 선물을 받습니까(35b)?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