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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누가복음 6: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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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누가복음 6: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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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
사도라 부르셨다
1. 안식일에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1)? 어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2)? ‘해서는 안되는 일’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2.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3-4)? 이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슨 뜻입니까(5)?
3.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은 어디로 가셨으며, 거기에는 누가 있었습니까(6)? 종교지도자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7)? 이런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 저희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8-10)?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여 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을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11)?
5. 그 무렵에 예수님은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12)? 기도하신 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13)? 왜 ‘열 둘’을 택하셨으며, 그들을 ‘사도’로 부르셨을까요?(막3:14)
6.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은 자들은 누구입니까(14-16)? 이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들을 사도로 뽑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사도라 부르셨다
누가복음 6:1-6:16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는데”(13)
김용화 감독의 영화 ‘국가대표’를 보면, 한국에서 정말 생소한 스키 점프 국가 대표를 한 감독이 뽑아서 훈련을 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뽑힌 이들은 정말 인간적으로나 실력적으로나 부족한 사람이요, 어떻게 보면 하류 인생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으나 그들은 동계올림픽에서 사람들의 그런 기대를 박살을 내버립니다. 오늘 말씀에도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너무나 부족한 12명의 제자들을 뽑아서 영적 국가대표라 할 수 있는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메마른 시대를 구원할 동역자로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박식한 성경학자들 중에 사도를 뽑지 않으시고, 너무나 부족한 이들에게 소망을 두고 사도로 뽑으셨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어떤 삶이지? 또한 우리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배가 고프고 허기가 져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안식일이라지만 그 밀밭에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 밀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 이삭을 자르고, 그것을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이 때,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몇몇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격분을 하며 말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Why are you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여기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밀 이삭을 자른 것과 그것을 비벼서 먹은 일을 말합니다.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곧 곡식을 추수한 행위를 한 셈이고, 그것을 손으로 비빈 것은 곧 탈곡을 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까다로운 안식일 법을 들이대면서 그렇지 않아도 배고픈 제자들을 마구 정죄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밀을 먹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어떻게 변론해 주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다윗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에게 쫓김을 받아 놋 땅으로 도망한 다윗은 너무나 배고 고파서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에게 빵을 좀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제단의 빵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빵을 먹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이렇게 제사법을 어기면서까지 다윗에게 그 빵을 준 이유는 제사법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이 더 시급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비벼서 먹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위해 변론을 해주시는 이유도 율법을 지키려 하다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비록 율법을 못 지키더라도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이 중요하셨기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이유도 궁극적으로 양들이 더 생명력이 있고,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주신 이유도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되, 안식일만큼은 주님과 교제하면서 영적 충전과 안식을 누리도록 돕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저 역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은 웬만하면 책에서 손을 놓고 주님과 교제하는데 집중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소감을 쓰거나, 말씀 준비를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주일은 기다려지는 날이 되고, 공부하는데만 온통 마음이 뺏기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유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주일에도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을 때가 있었고, 이럴 때마다 저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느냐? 말것이냐?를 두고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을 하여 주십니까?
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안식일법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가 안식일 법 그 자체를 주인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느냐? 마느냐? 의 고민을 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 중심적으로 안식일을 보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물어보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신 것을 원하시면 그러한 일에 순종을 하고, 공부해도 된다고 하시면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안식일법 그 자체를 주인으로 삼다가 그것을 지킬까 말까 갈등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알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안식일을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오른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오른쪽이 마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른손은 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손이요, 많은 일을 하는 손입니다. 우리는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군대에서도 모든 무기류가 오른손잡이 중심적으로 설계가 되어 있으므로 왼손잡이들은 따로 불러서 훈련을 시킵니다. 그는 아마 이런 신체적 결함 때문에 군 징집에서도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남들은 두 손을 가지고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두드리지만, 그는 오직 왼손으로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르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의 마른손은 그에게 있어서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곳손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 사람이 겪는 육체적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잘 아시고 그를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회당 뒤에서 이 광경을 눈여겨보면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요 성경박사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른손이 마른 사람은 육신의 손이 마른 사람이면, 이 바리새인들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마른 자들이었습니다. 딱딱하고 엄격한 율법은 있으나 그 심정은 빼빼 말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한손 마른 사람을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일어나서 가운데 서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운데 선 이 한손 마른 사람에게 쏠렸습니다.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마른 손을 예수님께 내밀 때, 그의 팔에 살이 오르고 굵은 심줄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마른 손이 건장한 청년의 손으로 온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육신의 손만 회복이 된 것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손을 치유 받음으로서 그 동안 사람들 앞에서 감추며 열등감을 겪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도 온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마다 본문과 같은 감추고 싶은 마른 손이 있습니다. broken family의 마른 손,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의 마른 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 이러한 마른 손을 감추고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 앞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다른 손만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른 손으로 인한 그 마음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인한 마음의 어두운 고통을 잘 아시고 안식일이라도 찾아오셔서 그 문제를 고쳐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마른 손을 감출 것이 아니라, ‘네 손을 내 밀라’ 하십니다.
우리 광진 목자님은 새내기 시절 낮에는 탁구를 치고 밤에는 음란 비디오에 중독이 되어 어둠과 수치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극기야 는 시선 공포증이라는 내면의 병에 걸려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버스를 타도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든 것 같았고, 수업시간에도 뒤에 앉은 사람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요 기도모임 때,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로 인한 그 내면의 병도 부활의 능력으로 고쳐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 음란과 수치심으로 삐쩍 말라있는 그 부끄러운 손을 예수님 앞에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내 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보시고, 왜 손이 이 모양 이 꼴이냐? 탓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마른손을 온전히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그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 리더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운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일생 마른 손으로 인해 감추고 수치심 가운데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를 고쳐주시고자 ‘네 손을 내밀라’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한없는 긍휼하심과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나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예수님께 믿음으로 내밀므로 온전히 회복되는 은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한손 마른 병은 응급 환자가 아니므로 안식일 다음 날에 고쳐주시는 것이 더 현명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바리새인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굳이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고치심으로 어떻게 보면 화를 자초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마른 손 환자의 병만 고쳐주실 뿐 아니라, 율법에 눈이 멀어서 그 심정이 메말라 버린 이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당연히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눈이 멀어서 악한 일을 하고자 하였으며,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율법만 지키려 할 것이 아니라, 정작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무엇이 율법의 근본정신인지 그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의 어원은 ‘분리된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의 기원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기고 강대국의 포로로 살게 된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산데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았던 과거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는데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자 몸부림을 치며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백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의 시작은 이렇게 좋게 시작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초심을 잃고 그들의 신앙이 정형화되고, 형식화됨으로 영적인 생명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오직 율법 지키는 데만 온 힘을 다했습니다.
저는 2006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석사 논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리브가 목자님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가 저희 심령에 넘쳐흘렀고, 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저 나름대로 신앙의 규칙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와 양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점심시간에는 말씀 연구, 저녁 시간에는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신앙 서적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했습니다. 주일은 거룩하게 지키고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개인 신앙생활은 속세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잘 지키는데 도움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런 생활이 정형화가 되고, 형식화가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을 혼인 잔치와 비유를 했으나, 저 안에는 주님과 교제를 하는 혼인잔치의 기쁨은 없고, 오직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가 정한 영적인 규칙을 지키는 것만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바리새인과 같이 ‘분리된 사람, 거룩한 사람’인 되어버려서 연구실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는 동역자들을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매년 연 요절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22:39)’는 말씀을 붙잡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늘 돌이켜 보면, 자기 종교 생활은 열심히 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심정은 빼빼마른 채로 살아왔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시는지 잘 파악도 못하고 자기 종교 생활만 열심히 하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고집스러운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사 작년 여름 이후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의 종교적 규칙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그 일에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세운 생활 규칙이 무너지니깐 상당히 당혹스럽고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도우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제가 일생 화석화되고 생명력이 상실된 종교 생활을 할 것 이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또한 신랑 되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혼인잔치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심령이 자기 율법으로 인해 빼빼 메마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으로 촉촉한 심령을 가진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아마 영적으로 메말라 버린 그 시대를 품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에 눈이 멀어 그 심령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고, 백성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이 시대를 안타까워하시며 눈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후, 어떤 방향을 잡으셨습니까? 다같이 13절을 읽으시겠습니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택함을 받은 이들은 사랑이 메마른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메마른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혼자 일하시지 않으시고, 12명을 제자들을 택하셔서 이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함께 구원사역을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열두 명의 택함 받은 제자들은 ‘베드로와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와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될 가룟 유다’ 이었습니다.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어부 출신입니다. 이들이 아는 것은 고기 잡는 법, 배 모는 법, 그물 손질하는 법 밖에 없습니다. 마태는 이스라엘이 버린 세리 출신입니다. 도마는 눈으로 보고 손을 만져봐야 믿을 수 있는 의심많은 사람입니다. 빌립은 계산은 빠르나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뭔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배가 고프면 밀 이삭을 잘라 먹을 정도로 경우가 없기도 합니다. 성경지식도 부족하고 남을 가르쳤던 경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바로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할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5장 3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그래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적 지식이 풍부한 바리새인들을 택하여 사도로 보내지 않고,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많이 어리고 부족한 이들을 택하신 이유는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고자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의 묵은 포도주, 화석화되고 정형되어버려서 낡은 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바리새인들을 도저히 복음을 감당할 가죽부대로 사용할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주의 귀한 역사에 사용될 수 있는가? 그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정형화되고, 화석화되어 묵은 포도주가 더 좋다고 하며 그 안에서 안주할 때, 예수님께서는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감당할만할 일꾼으로 우리를 도저히 나를 사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부족하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질 수 있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 과거에는 이기적으로 살았으나 그래도 예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고 내가 가진 귀한 것을 뒤로 남겨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좇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사도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요한 계시록에서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2: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바리새인들이 처음 가졌던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잃고, 그들의 신앙이 율법으로 정형화되고 메말라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셨던 그 촛대를 12명의 택함 받은 제자로 옮겨버리셨습니다. 그리고 12명의 제자가 세웠던 그 초대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로마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 낡은 가죽 부대를 치워 버리시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새 가죽부대를 예비하셨습니다. 유럽의 기독교가 화석화 되자, 하나님은 그 낡은 가죽부대를 치워버리시고 100년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 조선을 복음을 감당할 새 가죽부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고 이사무엘 목자님과 사라베리 선교사님을 통해 대학생 선교의 새 가죽부대로 우리 모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이 생긴지 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지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에는 소감, 일용할 양식, 일대일 성경공부라는 좋은 영적 전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이 정형화 화석화되어 그 본질은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심령이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날마다 새 가죽부대가 되어서 복음의 귀한 일꾼으로 일생 귀하게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요, 스승을 잘 본받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사도는 제자와 같이 가르침을 받고, 스승을 잘 본받는 것 이상을 감당합니다. 사도는 그 가르침을 받은 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죄와 불신과 싸웁니다. 온실안의 화초의 삶을 사는 것이 니라, 그 씨앗을 바람에 퍼뜨리고 척박한 땅에서 스스로 뿌리는 내리는 야생화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삶에는 날마다 도전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말씀을 의지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돌파함으로 성장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심령으로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전함으로 예수님의 동역자의 삶을 삽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날마다 메마른 세상과 부딪히며 죄와 불신과 싸우는 이 사도의 삶은 결코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요 14:12)’ 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 가죽부대가 되어서 사랑이 메마른 이 시대에 배운 말씀에 의지하고 성령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 받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있는 회사와 학교와 가정을 넘어서 그리고 저 북한과 제 3세계까지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일을 하는데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율법만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이 옳은 일인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변론해 주시고, 안식일에도 손수 한 손 마른자의 그 병을 고쳐주시는 그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율법만 있고 사랑이 메말라 버린 그 시대 현실에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메마른 시대를 구원할 동역자로 새 가죽부대의 새 심령을 가진 12명의 제자를 택하여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내 삶에서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되고 정형화되어 형식만 남은 낡은 가죽부대가 있는 지 점검하고, 이를 새롭게 함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새 심령을 회복할 수 있기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이 메마른 이 메마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