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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누가복음 5:17-39

요절:누가복음 5:32

2010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오늘은 설명절입니다. 새해가 되면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말씀에는 정말 복이 없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받은 복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께 이 복을 받길 기도합니다.

 

첫째, 중풍병자 중풍병자는 오늘 말씀의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데, 갈릴리 및 유대의 모든 마을과 심지어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까지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침상에 눕힌 채로 데려왔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의 손상으로 운동신경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마음먹은 대로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심하면 전혀 손발을 쓰지 못합니다. 아주 가까운 곳도 자기 힘으로 가지 못합니다. 밥도 누군가가 먹여주어야 하고, 심지어 대소변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정말 힘든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중풍병자를 돕고자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무리 때문에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 때문에 안된다’면서 포기할 수 있습니다. 또 막연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무리 한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 가서 온풍기를 팔고, 알레스카에 가서 빙수를 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 대해 인정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지붕이라도 뚫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은 단순한 인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한 병자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 믿음으로 길이 막혔을 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지붕이라도 뚫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이들을 능력있게 하였고, 뜨겁게 하였고, 위대한 도전을 하게 하였습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돕는데 있어서 심정도 필요하고 열정도 필요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도전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막연한 기대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세우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도전할 수 있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뚫으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을 고쳐주시기를 기대하고 믿으므로 지붕이라도 뚫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가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희생했고, 대가를 치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나 믿음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만나면 마음이 힘듭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무시한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주시는 것이 더 안 좋은 것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좋은 것, 더 중요한 것을 주십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은 다음에 물고기가 아니라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는 물고기보다 예수님이 더 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풍병자나 또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나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다급한 것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중풍병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입니다. 생활하는데 어렵고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는 속에 감추어진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 영혼에 깊숙이 박혀서 아주 뿌리를 썩게 하는 문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병만 고치고, 이 사람 마음 깊숙한 곳에 박힌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병을 고쳐놔야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손발은 멀쩡한데 중풍병에 걸린 사람처럼 무력하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전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시간만 죽이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뇌혈관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병들고,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영혼의 혈관이 막혀서 영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병의 뿌리가 바로 죄입니다. 결국 죄가 사람을 무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도우셨습니다. 중풍병자의 입장에서,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믿음으로 가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의 병든 부분을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의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죄용서를 통해 나 자신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다니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 한분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말 중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죄가 그렇게 인생에 심각한 문제라면 해결책이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나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나의 무력한 삶, 내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삶에서 나를 도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죄용서와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쉬우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이런 질문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쉽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치워 들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가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누웠던 침상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갔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나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죄용서를 받는 것은 곧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6절에 보면, 사람들이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신기한 것을 봤습니다. 놀라고 감동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보고 놀라고 감동은 받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보는 것을 가리켜 ‘관객의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신기해하고, 놀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를 받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가장 큰 복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 오늘의 두 번째 주인공인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갈릴리 바다에서 잡아 로마로 수출하는 물고기에 대해서, 또 고기잡이 배에 대해서 세금을 많이 징수했습니다. 그런데 세금의 일정한 부분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먹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세무 공무원이 아니라, 입찰해서 거둔 세금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입찰세리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마음대로 세금을 때리고 거둡니다. 그래서 칼만 안 들었지 강도수준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가 오늘도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따라 올까 겁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을 돕는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장애물 앞에서 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따라오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레위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에게 다른 것이 아닌 중풍병자에게 준 것과 같은 죄용서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가장 큰 복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하시며 그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점에서 이 말씀은 그를 향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레위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두고 갈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두고 가기가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죄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이후에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레위는 자신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혼자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예수님과 그룹미팅을 주선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므로 죄용서를 받은 그의 마음은 잔치를 하는 것과 같은 기쁨과 감동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가 하면서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레위는 병든 사람입니다. 그의 병명은 죄입니다. 그 죄가 그를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하고, 욕심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그 죄가 그를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가 되게 하고, 고독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레위가 같이 병이 깊은 자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러서 그 죄를 회개시키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므로 그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삶이 잔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가장 탁월한 의사가 되셔서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한 영혼의 질병인 죄를 치료해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건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불러서 건강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셋째, 사람들 오늘의 세 번째 주인공은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리새파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군요” 금식과 기도는 당시 경건한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예수님에게도 중요한 경건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은 단지 금식과 기도를 왜 하지 않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금식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것을 통해서 마음에 고통이 되는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들이 갖는 공통점입니다. 유사무엘 선교님 소식이 조선일보에 나온 다음에 여기저기에서 메일이 많이 옵니다. 그중에서 인도에서 몇 년 동안 수행을 하신 한 스님에게서도 멜이 왔습니다. 인도수행을 마치고 이제 자기에게 시간이 있는데, 앞으로 2-3년동안 우간다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데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스님이 선교사역인지 모르고 무료봉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하는 것은 나름대로 만족감이 있습니다. 뭔가 해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보면, 자기들과 방식이 다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을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생활은 내가 금식하고 기도해서 뭔가 만족을 얻고 뭔가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바로 신랑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레위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처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용서를 받은 기쁨과 감동을 나누는 기쁨의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물론 금식하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게 신랑되신 예수님이 없을 때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나의 무엇을 이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새 옷을 떼어서 낡은 곳에 붙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새 옷은 찢어져서 못쓰게 되고,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 옷은 새 옷 그대로 입어야 합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며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가죽부대를 부풀게 하면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부대는 못쓰게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죄의 용서,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은 새 옷과 같습니다. 또 새 포도주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기 생각이나, 종교적인 전통은 헌옷이요,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것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몇 가지만을 가져다가 자기 옷에 붙이고자하고, 자기 부대에 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옷도 버리고, 또 가죽부대까지 터지게 됩니다. 지금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불평하고 따지는 것은 그 마음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영접하고 잔치를 즐기려면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눌러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죄용서를 받을 수 없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복을 얻고, 기쁨을 얻으려면 먼저 내 마음을 회개하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께 가는 장애물이라면 지붕이라도 뚫어서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또 뒤에 두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주시는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아서 잔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사람을 예수 앞에 놓고자 할 때 어떤 어려움에 부딪쳤습니까(17-19a)?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19b)? 왜 이렇게까지 했습니까?

 

2. 예수님께서 보신 것이 무엇이며, 중풍병에 걸린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20)?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셨을까요?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21)?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이셨습니까(22-24)?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25-26)?

 

4. 레위는 어떤 사람입니까(27a)?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27b)?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며, 레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28)? 그는 왜 잔치를 했을까요(29)?

 

5.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0)?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31,32)?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6. 저희가 어떤 문제를 제기했습니까(33)? 예수님은 어떤 비유로 그들에게 답하셨습니까(34-35)? 또 다른 비유에서 ‘새 포도주’‘새 부대’는 무엇을 말할까요(36-37)?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39)? 이를 볼 때 누가 예수님이 주시는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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